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처음 본 건 평일 저녁이었습니다. 극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볼 수 있는 로맨스 영화를 기대했는데,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생각보다 긴 여운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은 2024년에 개봉한 이언희 감독의 연출작으로, 김고은과 노상현이라는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겉으로는 청춘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형태와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다루는 성숙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재희와 흥수라는 두 인물이 함께 살아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를 다시 질문하게 만듭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관계의 가치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재희와 흥수의 관계였습니다. 둘은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며, 완전한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경계에 있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은 바로 이 모호함입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최근 한국 영화에서 비전형적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 증가하는 추세인데(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영화도 그런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재희는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거침없어 보이지만, 사랑이 끝날 때마다 깊은 공허를 마주합니다. 흥수는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숨긴 채 살아가며,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늘 외롭습니다. 여기서 성적 지향이란 개인이 어떤 성별의 사람에게 감정적·신체적으로 끌리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두 사람의 관계가 우리가 흔히 아는 '관계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의 동거는 여전히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지만, 영화 속 두 인물은 그 기대를 비켜갑니다. 그들의 관계는 로맨틱한 설렘 대신 삶을 버티게 하는 안정감으로 채워집니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형태를 질문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 누군가를 소유하지 않고도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저는 특히 두 사람이 밤늦게 집에 돌아와 아무 말 없이 같은 공간에 있는 장면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은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작은 선택들의 축적이라는 메시지가 조용히 전해집니다.
이 '동행'의 서사는 관객에게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모든 관계가 명확한 이름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그 애매함 속에서 더 진실한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신건강의학 분야에서도 관계 만족도는 관계의 형태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춘의 여정
흥수의 서사는 영화에서 가장 섬세하고 깊이 있는 축을 형성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을 쉽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기서 성 정체성이란 개인이 자신의 성별과 성적 지향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개인의 자아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솔직히 이 부분이 제게는 예상 밖으로 감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는 그의 정체성을 자극적이거나 극적인 갈등 구조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과장된 갈등이나 눈물 대신 망설임과 침묵, 말하지 못한 감정의 공백으로 그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언희 감독의 연출은 조용하고 현실적인 톤을 유지하며, 관객은 그가 왜 망설이고 왜 숨으며 왜 쉽게 상처받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흥수가 성장하는 과정은 곧 자기 수용(self-acceptance)의 과정입니다. 자기 수용이란 자신의 모든 면, 특히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측면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 과정을 말합니다. 그는 완벽하게 강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더 솔직해지고, 조금 덜 두려워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가 훨씬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극적인 전환점이나 큰 사건보다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쌓여 사람을 바꾸는 과정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의 여정은 많은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재희와의 관계는 흥수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재희는 흥수에게 세상과 맞서는 용기를 주고, 흥수는 재희에게 감정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줍니다. 서로가 서로의 결핍을 메워주는 구조 속에서 두 인물은 함께 성장합니다.
영화는 비교적 긴 시간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20대 초반의 방황, 20대 후반의 불안, 30대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의 선택까지 다룹니다. 청춘 영화의 전형처럼 강렬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환에 의존하지 않고, 일상의 축적을 통해 변화를 보여줍니다. 작은 말다툼, 술자리의 대화, 새벽의 귀가 장면, 이별 후의 침묵 같은 순간들이 모여 인물의 성장을 만듭니다.
대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연대
〈대도시의 사랑법〉이 그리는 청춘은 빛나기보다는 흔들립니다. 대도시 서울은 기회의 공간이자 동시에 고립의 공간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서울의 1인 가구 비율은 약 37.2%에 달하는데(출처: 통계청), 이는 수많은 사람이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살지만 정서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재희와 흥수는 이 대도시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합니다. 이 영화가 포착하는 청춘의 모습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입니다. 재희는 사랑에 번번이 실패하고, 흥수는 관계 속에서 도망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실패를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청춘 시절의 실패는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실패가 쌓이면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춘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미완의 상태임을 인정하며, 그 불완전함 속에서 진정한 성장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영화 속 서울은 두 인물의 내면과 닮아 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복잡하고 불안정합니다. 이언희 감독의 연출은 과장되지 않고 담백합니다.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을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고 관찰합니다. 공간과 침묵, 표정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며, 음악 역시 감정을 끌어올리기보다는 여백을 남깁니다.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시각적 연출 요소가 있습니다:
- 흥수가 혼자 남겨진 장면에서 프레임의 여백을 강조하여 내면의 고립을 표현
- 재희와 함께 있을 때는 공간이 조금 더 따뜻하게 채워지는 대비
- 도시의 야경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으로 고독과 익명성을 동시에 포착
시각적 대비를 통해 관계의 온도를 보여주는 섬세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인물의 얼굴에 머무르는 시간, 좁은 방 안에서의 숨소리까지도 감정의 일부가 됩니다.
영화는 극적인 해결이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대신 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남습니다. 관계는 변하지만,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랑이 영원할 필요는 없지만, 함께한 시간은 우리를 바꾼다는 조용한 진실을 전합니다.
결국 〈대도시의 사랑법〉은 사랑을 소비하지 않고, 정체성을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청춘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대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버티는 일이며, 그 '함께'의 방식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사랑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함께 버텨주는 시간이라는, 선명하면서도 따뜻한 문장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